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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자산이 23조가 넘는다는 부영그룹 회장님 ㅋㅋㅋ

0.jpg.ren.png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비상장 회사

부영그룹 

재계서열 19위인데 비상장 회사 

표의 저 숫자가 이중근 회장 혼자 가지고 있는 지분임 

자산총액 23조짜리 그룹 지분의 대부분을 혼자 가지고 있는 

사실상 1인 주주 기업임

6000356735_20091126.jpg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비상장 회사

참고로 회장 막내 아들이 

영화 바람 감독임 

혼자 어울리지 않게 생뚱맞게 있는 부영엔터테인먼트라는 

자회사가 괜히 있는게 아님ㅋㅋㅋ

당시 삼성 이병철 회장님보다 돈이 10배 많았던 백할머니..

당시 삼성 이병철 회장님보다 돈이 10배 많았던 백할머니..

2. ‘명동 백할머니’ 백희엽

7bdff07de6b1db9c8de77b6b719c2eb0.jpg 한국 사채시장을 주름잡던 3인방

“투기는 죽어나는 곳에서 벌이는 자선행위야. 이 말의 뜻을 제대로 해석하면 자네는 투자의 처음과 끝을 아는거네.”



백희엽은 평양 대지주의 딸로 태어났다. 6,25전쟁이 터지고 부산으로 월남한 백희엽은 얼마 안 되는 돈만 가지고 급하게 내려왔지만, 부산에서 페니실린과 마이신(항생제) 을 팔며 종잣돈을 만들었고 대구에서 군복 장사와 제지 사업에 뛰어들었다.

f08936cad89c7f4ed3528df1666d213f.jpg 한국 사채시장을 주름잡던 3인방

1958년 건국채권 가격이 20% 밑으로 떨어지는 국채파동이 일어나자 백희엽은 닥치는 대로 건국채권을 긁어모았고 큰 부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백희엽은 채권과 사채시장에 뛰어들어 명동 사채업계의 ‘큰손’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1960년대 후반, 주식 시장이 성장하면서 한국 금융이 채권 중심에서 주식 중심으로 넘어가자 백희엽도 주식 투자를 시작한다. 백희엽은 고성일과는 정반대로 전형적인 ‘우량주 투자’를 고집했다. 수익성이 좋아 보이는 기업 주식만 골라서 사들여 2, 3년을 묵힌 뒤 주가가 오르면 차익 실현에 나섰다.

70년대 초에는 삼보증권(현 대우증권) 주식을 10%나 보유한 2대 주주였고, 300억에서 400억이나 되는 자금을 굴렸다. 1970년 우리나라 증시 전체 시가총액이 970억원이었던 시절이었다.

명동 백할머니는 엄청난 돈을 보유한 갑부였지만 물욕이 없었는지 돈을 쓰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수입품과 사치품을 끔찍하게 싫어했고, 검소한 생활을 유지했다. 백희엽이 95년에 사망할 때 언론은 그녀의 실물자산이 200억대였다고 보도했다.

백할머니의 장남 박의송은 서울대를 나와 미국 MBA를 마치고 삼보증권 상무이사를 거쳐서 우풍상호신용금고 회장 자리에 올랐는데, 훗날 전설적인 공매도 사건으로 기억되는 ‘성도이엔지 공매도 사건’을 일으켰다가 회사를 말아먹었다.

2006121969341_2006122208401.jpg 한국 사채시장을 주름잡던 3인방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이 그녀의 제자였고,

1.jpg 한국 사채시장을 주름잡던 3인방
2.jpg 한국 사채시장을 주름잡던 3인방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백선엽 대장과 선인학원을 설립한 백인엽 중장이 그녀의 사촌이다.


3. ‘현금왕’ 단사천

4b15c458e08e4164c46e6e25a1b2ab82.png 한국 사채시장을 주름잡던 3인방

단사천 회장은 1950년대부터 명동 사채시장을 휘어잡은 ‘큰 손’으로 꼽혔다. 사채업계에서 수많은 중소형 사채업자들을 거느린 전주로 군림하며 ‘지하의 재벌’이라고 불렀고, 그 이명에 걸맞게 삼성과 현대가 손을 벌릴 정도로 큰 돈을 손쉽게 조달한 사람이다.

그는 다른 큰손들과는 달리 오로지 사채업과 부동산에만 열중했고, 사채로 번 돈을 계속해서 사채업에 재투자해 종국에는 대기업 회장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을로 부리는 갑 중의 갑이 되었다.

1960년대 중반 단사천이 한 번에 빌려줄 수 있었던 현금량은 약 60억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삼성그룹의 연간이익이 약 190억원이었는데, 단사천은 하루에 삼성그룹 연간 이익의 1/3에 달하는 자금을 빌려줄 정도의 재력가였다. 때문에 왕회장이라고 불리던 회장 중의 회장, 정주영 회장도 단사천에게 온 전화만큼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받았다고 전해진다.

1974년에는 재벌 회장님들을 제치고 종합소득세 납부 순위 7위에 이름을 올렸으며, 1980년대에는 하루에 움직이는 자금의 규모가 3000억데 달했다고 한다.

IMF 이후 기업의 상호출자, 빚보증, 차입경영 등등이 제한되며 전통적인 명동 사채시장이 박살난 이후에도 전성기 시절 긁어모은 부동산 덕택에 그의 재산은 건재했다. 주식을 좀 해 봤다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해성산업이 바로 단사천 회장의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세워진 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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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사천은 2001년에 사망했고 해성산업은 아들인 단사완에게 넘어갔다. 지금도 해성산업은 테헤란로에 있는 해성 1/2 빌딩을 비롯해 서울의 온갖 알짜배기 부동산들을 갖고 있다.